재영이 재완이가 생기니 자연적으로 평소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조상, 성씨 이런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자료 입니다.
http://hometown.hometer.com/main.asp
http://www.rootskorea.net
시 조 : 이알평(李謁平)
시조 유래 :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밝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 촌장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켰고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키신 선구자였씀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의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라고 사성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 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창성 유래 :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 유리왕이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꼐 사성하여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하고 그에게 이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후 후손들은 알평의 36세손으로 신라 진골출신
인 거명을 중시조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경주 이씨의 세계는 거명의 17세손(고려 말기)에서 8파로 대별되
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분파된다. 8대파는 평리공파·이
암공파·익재공파·호군공파·국당공파·부정공파·상서공파·사인공파등이 있으
며, 이밖에 판전공파·월성군공파·시랑공파·석탄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전통
의 명문거족인 경주 이씨는 고려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조에 와서
도 수많은 공신·학자·명신을 배출하여 명문의 대를 이었다. 가문을 대표하
는 인물중에 상서공파의 백사 항복의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
으며, 익재공파 공린의 집안과 국당파인 매죽헌 완의 집안에서는 훌륭한 상
신 및 문형이 배출되어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지 명 :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徐羅伐)을 세웠다. 이 나라가 307년(기림왕 10)부터 신라로 개칭 ·발전하였는데,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 역할을 하였다.
고려가 신라를 합병한 935년(태조 18)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년 4월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7월 양북면(陽北面)에서 감포리(甘浦里) 외 8개리가 감포읍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1949년 5월에는 강서면(江西面)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고, 군의 명칭이 월성(月城)으로 바뀌었다.
1973년 7월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0년 12월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월성군의 명칭이 경주군으로 환원되었다. 95년 1월 경주시와 경주군이 합쳐 통합시가 되었다.
현재 경주시는 구(舊)경주시의 성내 ·성동 ·황오 ·중앙 ·성건 ·탑정 ·황남 ·인교 ·선도 ·도동 ·보황 ·용황 ·동천 ·정래 ·불국 ·보덕의 16개동과 감포 ·안강 ·건천 ·외동의 4개읍 및 양북 ·양남 ·내남 ·산내 ·서 ·현곡 ·강동 ·천북의 8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0년 현재 하양 ·진량의 2개 읍, 와촌 ·자인 ·용성 ·남산 ·압량 ·남천의 7개 면, 중앙 ·중방 ·북부 ·남부 ·서부 ·동부의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문 소개 :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
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별(鼈) 집으로 불리우는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고려 때의 경주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근대 인물로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과 재계의 거목이었던 삼성그룹의 이병철회장이 있다.
계 파 : 경주이씨는 중시조 이거명의 17~21세손에서 크게 14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크고 작은 70여개 파로 분파된다.
-평리공파(評理公派) : 16세손 이인정(李仁珽)을 파조로 한다.
어모공파: 21세 식의 후손
판서공파: 21세 근의 후손
사정공파: 21세 정의 후손
세촌공파: 22세 문좌의 후손
-이암공파(怡庵公派) : 17세손 이관(李琯)을 파조로 한다.
-익재공파(益齋公派) : 17세손 이제현(李齊賢)을 파조로 한다.
-호군공파(護軍公派) : 17세손 이지정(李之正)을 파조로 한다.
-국당공파(菊堂公派) : 17세손 이천을 파조로 한다.
-부정공파(副正公派) : 17세손 이매(李邁)를 파조로 한다.
-상서공파(尙書公派) : 17세손 이과를 파조로 한다.
-사인공파(舍人公派) : 17세손 이수(李蓚)를 파조로 한다.
-판전공파(判典公派) : 15세손 이강을 파조로 한다.
-월성군파(月城君派) : 21세손 이지수(李之秀)를 파조로 한다.
-직장공파(直長公派) : 19세손 이양오(李養吾)를 파조로 한다.
-석탄공파(石灘公派) : 19세손 이존오(李存吾)를 파조로 한다.
-진사공파(進士公派) : 19세손 이양중(李養中)를 파조로 한다.
-교감공파(校勘公派) : 19세손 이존사(李存斯)를 파조로 한다.
인 구 :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남한에 총 291,120가구, 1,217,2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 성 촌 :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
전북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전남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경북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경남 거창군 남상면 임불리
전북 완주군 봉동면 성덕리
전남 해남군 화선면 율동리
경북 의성군 다인면 신락동
경남 울주군 농소면 호계리
종친회
경주 경주이씨회관 054-673-3346 경북-봉화-봉화-삼계-75...(봉화군경주이씨회관)
경주 경주이씨국담공파 02-498-0864 성동-성수1가-660-7
경주 경주이씨종친회 052-252-8058 울산-동-동부-272-3(제실)
경주 경주이씨종친회 061-834-7677 전남-고흥-고흥-남계-691
경주 경주이씨중앙청년회 052-257-1564 울산-남-삼산-1590-7(동양공구2층)
경주 경주이씨중앙화수회 02-742-6250 종로-명륜동1-33-30(4층)
경주 경주이씨화수회 033-252-7556 강원-춘천-근화-251
경주 경주이씨화수회 031-448-3313 경기-안양-만안-안양3-695
경주 경주이씨광주전남화수회 062-222-4515 광주-동-금-177(동평회관5층)
경주 경주이씨대구경북화수회 053-781-0438 대구-수성-지산1-646-2
경주 경주이씨대호군종회 02-529-9921 서초-양재-119-2
경주 경주이씨밀양화수회 055-354-2541 경남-밀양-내이-1023(이씨화수회)
경주 경주이씨부산시화수회 051-467-0211 부산-동-초량1-1203-10(프레지던트오피스텔803호)
경주 경주이씨상주시종친회관 054-536-2686 경북-상주-냉림-178(경주이씨종친회관2층)
경주 경주이씨수원화성화수회 031-256-0594 경기-수원-권선-교-79-6
경주 경주이씨아산시화수회 041-531-7557 충남-아산-온천1-1400
경주 경주이씨영주화수회 054-634-1131 경북-영주-가흥1-73
경주 경주이씨익재공파대종회 042-257-3450 대전-중-대흥-470-3
경주 경주이씨인제공파화수회 031-972-3992 경기-고양-덕양-행신-648-2(2층)
경주 경주이씨전북화수회 063-272-5958 전북-전주-덕진-금암1-515
경주 경주이씨죽헌공파종친회 062-951-6998 광주-광산-월곡-55-3
경주 경주이씨충청북도화수회 043-223-5552 충북-청주-상당-영운-75
경주 경주이씨강서양천구화수회 02-2601-1793 강서-화곡7-400-66(2층)
경주 경주이씨대구경북화수회 053-423-7764 대구-중-동인4-429-1(1층)
경주 경주이씨인천직할시화수회 032-766-7647 인천-중-인현-26-1(피보약국3층)
문중 인물 :
1. 이광좌 李光佐 조선 중기의 문신 1674 -1740 호는 운곡
1694년(숙종2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부수찬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 이조 참의를 지내고, 1715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1년(경종1년) 사직에 있을 때 [연잉군(뒤의 영조)]의 대리 청정을 반대하여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몰아낸 뒤, 평안도 관찰사,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가 노론의 집권으로 파직당했다. 1727년(영조3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영의정에 오르고,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경종실록>, <숙종실록>의 편찬을 담당했다. 1729년 영중추 부사로 있으면서 [영조]에게 '탕평'을 상소하여 당쟁을 막는데 힘썼고, 왕의 부탁으로 노론 [민진원]과서로 도와 노론, 소론의 연립 정권을 수립, [영조]가 왕위에 있는 동안은 비교적 심한 당쟁이 없도록 했다. 1737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박동준]의 모함으로 울분 끝에 단식하다 죽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작품 : 운곡실기
2. 이득윤李得胤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1553-1630 호는 서계
20세 때 [서기]에게 <대학>을 비롯하여 <심경>, <주역> 등을 공부했으며, 이어 [박지화]와 역학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광해군] 때는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를 피하여 고향에 돌아가, 자연에 묻혀서 [김장생]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태국도와 역학에 대해 토론하였다. 1623년 '인조 반정'때는 선공감정의 벼슬을 지냈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 때는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등 백성을 어질게 다스려 존경을 받았다. 음악에도 뜻을 두어 1620년에는 <현금 동문유기>를 편찬하였다.
작품 서계집
3. 이벽李蘗
조선 말기의 천주교인 1754-1786 본명은 덕조
1777년(정조1년) [정약전] 등이 벌인 토론회에 참석했다가 서학(천주학)에 흥미를 느껴,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는 [이승훈]에게 부탁하여 천주교에 대한 서적을 구해 오게 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후 [이승훈]에게서 서례를 받고 남인들 사이에 신자를 모아 천주교 보급에 크게 활약하였다. 1785년 서학 탄압 운동이 표면화 되자, 아버지가 그의 선교 운동을 말리다가 목매어 죽은 사실에 충격을 받고, 천주교를 믿지 않고 지내던중 페스트로 죽었다.
4. 이병성李炳星
국악사 1909-1960 호는 두봉 '[이왕직] 아악원 양성소'의 제3기생으로서 피리를 배웠다. 1926년 졸업한 후 아악수장, 아악사 등의 자리를 거쳐, 1952년에 국립 아악원 국악사가 되었고, 이어 1960년에는 국악 진흥회가 주는 국악상을 받았다.
업적 / 작품 국악상
5. 이상백李相佰
사회학자, 체육인 1904-1966
경상 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한 후, 1927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3년 동안 동양학과 사회학을 연구하였다. 1930년 일본 농구 협회를 결성 했으며, 1932년에는 제9회 올림픽 대회에 일본 대표로 로스앤젤레스를 다녀왔다. 이어서 제11회 토오쿄오 올림픽 준비 위원으로 미국, 영국, 도이칠란트 등을 시찰했다. 1946년에는 조선 체육회 이사장을 거쳐, 1951년 대한 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하여, 제15, 16, 17, 18회 올림픽 대회에 한국 대표단 임원으로 참가하였다. 1955년에는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학술원 회원, 사회학회 회장을 지냈다. 이어 조선 왕조사를 연구하여 1963년 건국 문화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64년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 한국 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업적 / 작품 : 건국 문화 훈장 대통령장, 한국 문화사 연구론, 이조 건국의 연구
6. 이상설李相卨
독립 운동가 1871- 1917 호는 보재
인물.. 내용 어릴 적부터 영어, 법률 등을 공부하였으며, 189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의 참찬이 되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그는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한 다음 자살을 꾀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그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서, 결코 황제의 뜻이 아님을 호소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갔다. 1910년 한일 합방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세계 각국에 발송, 독립 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청을 받은 러시아 관언에게 붙잡혀 투옥 되었으나,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이동녕]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보>를 발행하여 교포들을 계몽하는 한편 산업 발전에도 이바지 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업적 / 작품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
7. 이상협李相協
소설가, 언론인 1893-1957 호는 하몽
인물.. 내용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오 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당시에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편집국장으로 일하여 우리나라 언론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1923년 일본의 칸토오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는 혼자 일본으로 거너가 한국인 학살 사건을 취재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외국 소설의 번역과 창작 등을 발표하였다.
업적 / 작품 해왕성, 무궁화
8. 이상화李相和
시인 1900 -1941 호는 상화(尙火)
인물.. 내용 경상 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중동 중학교를 거쳐 일본 토오코오 외국어 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대구 교남 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교편을 잡았다. 1917년 고향에서 [현진건], [백기만] 등과 시집 <거화>를 프린트판으로 발간했으며, 1922년 문예잡지 <백조>의 동인이자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다. 이어 <가을의 풍경>, <그날이 그립다> 등 탐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썻으나, 1926년 잡지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로 방향을 바꾸어서, <역천>, <태양의 노래> 등 일련의 반항적인 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뒤에 [이육사], [윤동주] 등에게 영향을 주어 빛나는 민족 시사를 이룩케 했다. 1935년부터 2년동안 중국을 방랑하고 돌아와 41세를 일기로 대구에서 위암으로 죽었다. [백기만]이 편찬한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9편의 시 외에, 많은 시와 소설 평론, 번역 및 수필 등이 있으며, 1948년 대구 달성 공원에 우리 나라 최초의 시비인 '상화 시비'가 세워졌다
9. 이수경李壽卿
거문고의 명수 1882-1955 호는 송사
인물.. 내용 아악부에서 아악사로 일했다. 거문고를 특히 잘 탔으며, 또한 여러 종류의 악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아악부에서 악사로 있을 때에 거문고와 악장 등을 가르쳤다. 단소를 잘 불었고 시조도 잘 읊었다. 거문고 중에서도 특히 <영산회상>을 잘 탔다
10. 이시영李始榮
독립 운동가, 정치가
1868 -1953 호는 성재
인물.. 내용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1891년(고종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우승지, 궁내부 수석 참의 등을 지냈다. 1896년 [김홍집]이 살해되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1905년 다시 등용되었다. 1901년 한일 합방이 되자, 만주로 들어가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해방을 위한 청년 장교의 교육에 힘썼다. 1919년에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 등을 지내면서, 1929년 '한국 독립당'을 세워 초대 감찰위원장에 취임,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회 위원장 등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가 1951년 물러났다. 1953년 부산으로 피란가서 병으로 죽었으며 죽은 뒤 국민장을 지냈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업적 / 작품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
11. 이완李浣
조선 중기의 무신 1602-1674 호는 매죽헌, 시호는 정익
162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의 부하 장군으로서 싸움에 나가 정방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어 1638년에는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1643년에는 삼도 통어사가 되었으며, [효종]의 북벌 계획 때 어영대장으로 뽑혀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새로 성을 쌓는 등 전쟁 준비를 하였다. 1673년에는 포도대장이 되었으며,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12. 이유원李裕元
조선 말기의 문신 1814-1888 호는 귤산, 시호는 충문
1841년 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65년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나빴던 그는 1873년에 대원군이 물러나자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1882년에는 전권 대신이 되어 '제물포 조약'에 조인하였다.
13. 이유태李惟泰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1607 - 1684 호는 초려, 시호는 문경
[김집]의 제자로 공부하였다. 1660년 공조 참의의 벼슬에 올랐으며, 1670년에는 이조 참의가 되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하였다. [김상헌]의 충성심과 의로운 마음을 찬양하는 긴 글을 왕에게 올려, 벌을 주려고 한 일에 반대하였다. 처음에는 [송시열]과 친한 사이였으나 학문에 대한 의견이 틀려 사이가 벌어졌다. 죽은 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14. 이의민李義旼
고려 명종 때의 무신 생년(?)-1196
인물.. 내용 천민 출신이었으나 체격이 좋고 기상이 활달하여 안찰사 [김자양]에 의하여 경군에 편입되었다가,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24년) [정중부]의 난 때 공을 세워 장군에 올랐다. 1173년(명종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를 위한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1174년 다시 [조위총]의 난을 토벌하고 상장군에 올랐으나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인 뒤에는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갔다. [경대승]이 죽은 후 다시 형부, 공부 상서를 거쳐서 판병부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래 글을 알지 못하여 무당의 말을 따르다가 반역을 모의하는 한편, 벼슬을 팔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횡포를 일삼아 별장에서 [최충헌]에게 살해되었다.
15. 이정암李廷암
조선 중기의 문신 1541-1600 호는 사류재, 시호는 충목
1561년(명종16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뽑혔으며, 1578년 양주 목사로 나가 향교와 도봉 서원을 다시 크게 지었으며, 또한 대동법을 실시하여서 많은 공적을 쌓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왕을 모시고 피란하던 도중에 개성에 이르러 동생과 함께 남아서 개성을 지켰다. 그러나 개성이 적에 의해 함락 되자, 피신하여 황해도에 가서 의병을 모아 활약하였으며, 그 공으로 황해도 초토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연안에서는 일본군 3000여 명을 무찔러 병조 참판의 벼슬에 올랐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다시 황해도 초토사가 되어 연안을 지켰다. 난이 끝나자 벼슬을 내놓고 풍덕으로 갔다. 1604년 연안을 지킨 공으로 선무 공신 2등이 되었고, 월천 부원군에 봉해졌다. 죽은 후 좌의정에 추증 되었다.
16. 이제현李齊賢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1287 -1367 호는 익재, 시호는 문충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뒤 높은 벼슬을 진냈다. 1314년(충숙왕1년) [백이정]의 밑에서 정주학을 공부 하였다. 그 해 원나라에 가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우고 나서 그를 불러 들이자, 베이징에 가서 원나라의 학자들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원나라 조정에 의해 귀양되자, 그 잘못됨을 밝혀 풀려나오게 했다. 그 후에도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원나라에 잡혀 갔을 때에도 원나라의 조정에 글을 올렸다. 1362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는 [공민왕]을 모시고 청주에 내려갔다. 만년에 벼슬 자리에서 물러 나온 뒤에도 왕의 명을 받아 실록을 편찬했다. 그가 쓴 <익재난고>란 책에 17수의 고려 가요를 한시로 번역하여 실은 것이 오늘날 고려 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업적 / 작품 익재 난고, 익재집, 역옹패설, 효행록
17. 이존오李存吾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1341-1371 호는 석탄
1360년(공민왕9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 서기가 되었다.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학문에 관해서 토론하였으며, 1366년에는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뒤에 [신돈]을 벼슬에서 쫓아내라고 주장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숨어서 생활 하던 중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죽은 후 뒤늦게 왕은 그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 대사헌의 벼슬을 내렸다.
업적 / 작품 석탄집
18. 이종성李宗城
조선 말기의 문신 1692-1759 호는 오천, 시호는 호강
1727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이듬해에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그 뒤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영조]가 실시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 후 다시 형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 좌의정, 영의정 등 높은 벼슬을 지낸 후 죽었다. 그는 성리학 에도 밝았으며, 문장을 비롯해서 글씨에도 뛰어났다. 벼슬에 있을 때 [장현세자]를 잘 보살폈으며, 죽어서는 [장헌 세자(사도세자)]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업적 / 작품 오천집
19. 이준경李埈慶
조선 중기의 문신 1499 -1572 호는 동고, 시호는 충정
1504년 '갑자사화'때에 형인 [윤경]과 함께 괴산으로 귀양을 갔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 나왔다. 1531년(중종26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이 되었으나, '기묘사화' 때에 =죄 없는 사람을 석방하라=고 주장하다가 [김안로] 등의 미움을 받고 벼슬 자리에서 쫓겨났다. 1555년에는 호남 지방에 왜적들이 쳐들어오자, 그는 전라도 도순찰사로 일본 군을 쳐부수고 돌아와서 병조 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568년에는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선조]에게 [정몽주]의 후손을 벼슬에 등용시킬 것을 건의 하였으며, 홍수와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백성들을 위하여 세금을 덜게 하여 존경을 받았다
20. 이하영李夏榮
조선 말기의 문신 1858-1919 호는 금산
인물.. 내용 외무아무 주사 등을 거쳐 미국 주재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다. 귀국 후 웅천, 흥덕의 현감, 회계원장 등을 지냈으며, 1898년 이후 주일 전권공사, 중추원 고문 등을 지냈다. 한일 합방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자작이되고 조선 총독부 고문을 지냈다
21. 이항복李恒福
조선 중기의 문신 1556-1618 ,호는 백사, 필운, 동강 시호는 문충
인물.. 내용 그는 어려서 부터 글 재주가 매우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소년 시절에 한음 [이덕형]과 슬기롭고 재치있는 장난을 잘 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름으로 짝이 되어 어린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1580년(선조13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589년에는 예조 정랑에 올랐다. 이 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이 모반 사건을 지혜롭게 처리함으로써 평난 공신 3등이 되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서북 지방으로 피란하게 되자, 대궐 안의 모든 신하들이 다 도망친 후였지만, [이항복] 만은 끝까지 남아 [선조]를 모시고 무사히 의주까지 피란을 갔다. 그 공으로 피란 도중 개성에서 오성군에 봉해졌으며,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남쪽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5번이나 병조 판서가 되어 활약 했고, 왕의 신임이 두터워져, 1602년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그 해 유학자들의 탄핵을 받게 된 [성혼]을 구하려다가 화를 입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는 당파 싸움이 심하였는데,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 대비]를 폐하자는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랐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심정을 시조로 읊었는데, 그 후 [광해군]이 그 시조를 읽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그는 당파 싸움에 말려들지 않았으므로 항상 혼자의 몸이었다. 외롭고 의롭게 살았던 그는 귀양간지 5개월 만에 63세로 죽었다. 죽은 뒤 다시 벼슬이 내려졌고, 예를 갖춰 장례를 지냈으며, 나라 안의 많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의 제자가 쓴 <북천일록>에 [이항복]이 귀양을 살던 당시의 일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업적 / 작품 주소계의, 사례훈몽, 노사영언
조상, 성씨 이런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자료 입니다.
http://hometown.hometer.com/main.asp
http://www.rootskorea.net
시 조 : 이알평(李謁平)
시조 유래 :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밝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 촌장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켰고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키신 선구자였씀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의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라고 사성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 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창성 유래 :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 유리왕이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꼐 사성하여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하고 그에게 이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후 후손들은 알평의 36세손으로 신라 진골출신
인 거명을 중시조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경주 이씨의 세계는 거명의 17세손(고려 말기)에서 8파로 대별되
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여 파로 분파된다. 8대파는 평리공파·이
암공파·익재공파·호군공파·국당공파·부정공파·상서공파·사인공파등이 있으
며, 이밖에 판전공파·월성군공파·시랑공파·석탄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전통
의 명문거족인 경주 이씨는 고려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조에 와서
도 수많은 공신·학자·명신을 배출하여 명문의 대를 이었다. 가문을 대표하
는 인물중에 상서공파의 백사 항복의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
으며, 익재공파 공린의 집안과 국당파인 매죽헌 완의 집안에서는 훌륭한 상
신 및 문형이 배출되어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지 명 :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徐羅伐)을 세웠다. 이 나라가 307년(기림왕 10)부터 신라로 개칭 ·발전하였는데,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 역할을 하였다.
고려가 신라를 합병한 935년(태조 18)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년 4월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7월 양북면(陽北面)에서 감포리(甘浦里) 외 8개리가 감포읍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1949년 5월에는 강서면(江西面)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고, 군의 명칭이 월성(月城)으로 바뀌었다.
1973년 7월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0년 12월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월성군의 명칭이 경주군으로 환원되었다. 95년 1월 경주시와 경주군이 합쳐 통합시가 되었다.
현재 경주시는 구(舊)경주시의 성내 ·성동 ·황오 ·중앙 ·성건 ·탑정 ·황남 ·인교 ·선도 ·도동 ·보황 ·용황 ·동천 ·정래 ·불국 ·보덕의 16개동과 감포 ·안강 ·건천 ·외동의 4개읍 및 양북 ·양남 ·내남 ·산내 ·서 ·현곡 ·강동 ·천북의 8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0년 현재 하양 ·진량의 2개 읍, 와촌 ·자인 ·용성 ·남산 ·압량 ·남천의 7개 면, 중앙 ·중방 ·북부 ·남부 ·서부 ·동부의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문 소개 :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
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별(鼈) 집으로 불리우는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고려 때의 경주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근대 인물로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과 재계의 거목이었던 삼성그룹의 이병철회장이 있다.
계 파 : 경주이씨는 중시조 이거명의 17~21세손에서 크게 14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크고 작은 70여개 파로 분파된다.
-평리공파(評理公派) : 16세손 이인정(李仁珽)을 파조로 한다.
어모공파: 21세 식의 후손
판서공파: 21세 근의 후손
사정공파: 21세 정의 후손
세촌공파: 22세 문좌의 후손
-이암공파(怡庵公派) : 17세손 이관(李琯)을 파조로 한다.
-익재공파(益齋公派) : 17세손 이제현(李齊賢)을 파조로 한다.
-호군공파(護軍公派) : 17세손 이지정(李之正)을 파조로 한다.
-국당공파(菊堂公派) : 17세손 이천을 파조로 한다.
-부정공파(副正公派) : 17세손 이매(李邁)를 파조로 한다.
-상서공파(尙書公派) : 17세손 이과를 파조로 한다.
-사인공파(舍人公派) : 17세손 이수(李蓚)를 파조로 한다.
-판전공파(判典公派) : 15세손 이강을 파조로 한다.
-월성군파(月城君派) : 21세손 이지수(李之秀)를 파조로 한다.
-직장공파(直長公派) : 19세손 이양오(李養吾)를 파조로 한다.
-석탄공파(石灘公派) : 19세손 이존오(李存吾)를 파조로 한다.
-진사공파(進士公派) : 19세손 이양중(李養中)를 파조로 한다.
-교감공파(校勘公派) : 19세손 이존사(李存斯)를 파조로 한다.
인 구 :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남한에 총 291,120가구, 1,217,2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 성 촌 :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
전북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전남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경북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경남 거창군 남상면 임불리
전북 완주군 봉동면 성덕리
전남 해남군 화선면 율동리
경북 의성군 다인면 신락동
경남 울주군 농소면 호계리
종친회
경주 경주이씨회관 054-673-3346 경북-봉화-봉화-삼계-75...(봉화군경주이씨회관)
경주 경주이씨국담공파 02-498-0864 성동-성수1가-660-7
경주 경주이씨종친회 052-252-8058 울산-동-동부-272-3(제실)
경주 경주이씨종친회 061-834-7677 전남-고흥-고흥-남계-691
경주 경주이씨중앙청년회 052-257-1564 울산-남-삼산-1590-7(동양공구2층)
경주 경주이씨중앙화수회 02-742-6250 종로-명륜동1-33-30(4층)
경주 경주이씨화수회 033-252-7556 강원-춘천-근화-251
경주 경주이씨화수회 031-448-3313 경기-안양-만안-안양3-695
경주 경주이씨광주전남화수회 062-222-4515 광주-동-금-177(동평회관5층)
경주 경주이씨대구경북화수회 053-781-0438 대구-수성-지산1-646-2
경주 경주이씨대호군종회 02-529-9921 서초-양재-119-2
경주 경주이씨밀양화수회 055-354-2541 경남-밀양-내이-1023(이씨화수회)
경주 경주이씨부산시화수회 051-467-0211 부산-동-초량1-1203-10(프레지던트오피스텔803호)
경주 경주이씨상주시종친회관 054-536-2686 경북-상주-냉림-178(경주이씨종친회관2층)
경주 경주이씨수원화성화수회 031-256-0594 경기-수원-권선-교-79-6
경주 경주이씨아산시화수회 041-531-7557 충남-아산-온천1-1400
경주 경주이씨영주화수회 054-634-1131 경북-영주-가흥1-73
경주 경주이씨익재공파대종회 042-257-3450 대전-중-대흥-470-3
경주 경주이씨인제공파화수회 031-972-3992 경기-고양-덕양-행신-648-2(2층)
경주 경주이씨전북화수회 063-272-5958 전북-전주-덕진-금암1-515
경주 경주이씨죽헌공파종친회 062-951-6998 광주-광산-월곡-55-3
경주 경주이씨충청북도화수회 043-223-5552 충북-청주-상당-영운-75
경주 경주이씨강서양천구화수회 02-2601-1793 강서-화곡7-400-66(2층)
경주 경주이씨대구경북화수회 053-423-7764 대구-중-동인4-429-1(1층)
경주 경주이씨인천직할시화수회 032-766-7647 인천-중-인현-26-1(피보약국3층)
문중 인물 :
1. 이광좌 李光佐 조선 중기의 문신 1674 -1740 호는 운곡
1694년(숙종2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부수찬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 이조 참의를 지내고, 1715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1년(경종1년) 사직에 있을 때 [연잉군(뒤의 영조)]의 대리 청정을 반대하여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몰아낸 뒤, 평안도 관찰사,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가 노론의 집권으로 파직당했다. 1727년(영조3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영의정에 오르고,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경종실록>, <숙종실록>의 편찬을 담당했다. 1729년 영중추 부사로 있으면서 [영조]에게 '탕평'을 상소하여 당쟁을 막는데 힘썼고, 왕의 부탁으로 노론 [민진원]과서로 도와 노론, 소론의 연립 정권을 수립, [영조]가 왕위에 있는 동안은 비교적 심한 당쟁이 없도록 했다. 1737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박동준]의 모함으로 울분 끝에 단식하다 죽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작품 : 운곡실기
2. 이득윤李得胤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1553-1630 호는 서계
20세 때 [서기]에게 <대학>을 비롯하여 <심경>, <주역> 등을 공부했으며, 이어 [박지화]와 역학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광해군] 때는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를 피하여 고향에 돌아가, 자연에 묻혀서 [김장생]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태국도와 역학에 대해 토론하였다. 1623년 '인조 반정'때는 선공감정의 벼슬을 지냈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 때는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등 백성을 어질게 다스려 존경을 받았다. 음악에도 뜻을 두어 1620년에는 <현금 동문유기>를 편찬하였다.
작품 서계집
3. 이벽李蘗
조선 말기의 천주교인 1754-1786 본명은 덕조
1777년(정조1년) [정약전] 등이 벌인 토론회에 참석했다가 서학(천주학)에 흥미를 느껴,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는 [이승훈]에게 부탁하여 천주교에 대한 서적을 구해 오게 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후 [이승훈]에게서 서례를 받고 남인들 사이에 신자를 모아 천주교 보급에 크게 활약하였다. 1785년 서학 탄압 운동이 표면화 되자, 아버지가 그의 선교 운동을 말리다가 목매어 죽은 사실에 충격을 받고, 천주교를 믿지 않고 지내던중 페스트로 죽었다.
4. 이병성李炳星
국악사 1909-1960 호는 두봉 '[이왕직] 아악원 양성소'의 제3기생으로서 피리를 배웠다. 1926년 졸업한 후 아악수장, 아악사 등의 자리를 거쳐, 1952년에 국립 아악원 국악사가 되었고, 이어 1960년에는 국악 진흥회가 주는 국악상을 받았다.
업적 / 작품 국악상
5. 이상백李相佰
사회학자, 체육인 1904-1966
경상 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한 후, 1927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3년 동안 동양학과 사회학을 연구하였다. 1930년 일본 농구 협회를 결성 했으며, 1932년에는 제9회 올림픽 대회에 일본 대표로 로스앤젤레스를 다녀왔다. 이어서 제11회 토오쿄오 올림픽 준비 위원으로 미국, 영국, 도이칠란트 등을 시찰했다. 1946년에는 조선 체육회 이사장을 거쳐, 1951년 대한 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하여, 제15, 16, 17, 18회 올림픽 대회에 한국 대표단 임원으로 참가하였다. 1955년에는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학술원 회원, 사회학회 회장을 지냈다. 이어 조선 왕조사를 연구하여 1963년 건국 문화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64년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 한국 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업적 / 작품 : 건국 문화 훈장 대통령장, 한국 문화사 연구론, 이조 건국의 연구
6. 이상설李相卨
독립 운동가 1871- 1917 호는 보재
인물.. 내용 어릴 적부터 영어, 법률 등을 공부하였으며, 189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의 참찬이 되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그는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한 다음 자살을 꾀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그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서, 결코 황제의 뜻이 아님을 호소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갔다. 1910년 한일 합방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세계 각국에 발송, 독립 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청을 받은 러시아 관언에게 붙잡혀 투옥 되었으나,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이동녕]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보>를 발행하여 교포들을 계몽하는 한편 산업 발전에도 이바지 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업적 / 작품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
7. 이상협李相協
소설가, 언론인 1893-1957 호는 하몽
인물.. 내용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오 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당시에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편집국장으로 일하여 우리나라 언론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1923년 일본의 칸토오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는 혼자 일본으로 거너가 한국인 학살 사건을 취재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외국 소설의 번역과 창작 등을 발표하였다.
업적 / 작품 해왕성, 무궁화
8. 이상화李相和
시인 1900 -1941 호는 상화(尙火)
인물.. 내용 경상 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중동 중학교를 거쳐 일본 토오코오 외국어 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대구 교남 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교편을 잡았다. 1917년 고향에서 [현진건], [백기만] 등과 시집 <거화>를 프린트판으로 발간했으며, 1922년 문예잡지 <백조>의 동인이자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다. 이어 <가을의 풍경>, <그날이 그립다> 등 탐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썻으나, 1926년 잡지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로 방향을 바꾸어서, <역천>, <태양의 노래> 등 일련의 반항적인 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뒤에 [이육사], [윤동주] 등에게 영향을 주어 빛나는 민족 시사를 이룩케 했다. 1935년부터 2년동안 중국을 방랑하고 돌아와 41세를 일기로 대구에서 위암으로 죽었다. [백기만]이 편찬한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9편의 시 외에, 많은 시와 소설 평론, 번역 및 수필 등이 있으며, 1948년 대구 달성 공원에 우리 나라 최초의 시비인 '상화 시비'가 세워졌다
9. 이수경李壽卿
거문고의 명수 1882-1955 호는 송사
인물.. 내용 아악부에서 아악사로 일했다. 거문고를 특히 잘 탔으며, 또한 여러 종류의 악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아악부에서 악사로 있을 때에 거문고와 악장 등을 가르쳤다. 단소를 잘 불었고 시조도 잘 읊었다. 거문고 중에서도 특히 <영산회상>을 잘 탔다
10. 이시영李始榮
독립 운동가, 정치가
1868 -1953 호는 성재
인물.. 내용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1891년(고종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우승지, 궁내부 수석 참의 등을 지냈다. 1896년 [김홍집]이 살해되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1905년 다시 등용되었다. 1901년 한일 합방이 되자, 만주로 들어가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해방을 위한 청년 장교의 교육에 힘썼다. 1919년에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 등을 지내면서, 1929년 '한국 독립당'을 세워 초대 감찰위원장에 취임,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회 위원장 등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가 1951년 물러났다. 1953년 부산으로 피란가서 병으로 죽었으며 죽은 뒤 국민장을 지냈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업적 / 작품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
11. 이완李浣
조선 중기의 무신 1602-1674 호는 매죽헌, 시호는 정익
162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의 부하 장군으로서 싸움에 나가 정방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어 1638년에는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1643년에는 삼도 통어사가 되었으며, [효종]의 북벌 계획 때 어영대장으로 뽑혀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새로 성을 쌓는 등 전쟁 준비를 하였다. 1673년에는 포도대장이 되었으며,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12. 이유원李裕元
조선 말기의 문신 1814-1888 호는 귤산, 시호는 충문
1841년 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65년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나빴던 그는 1873년에 대원군이 물러나자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1882년에는 전권 대신이 되어 '제물포 조약'에 조인하였다.
13. 이유태李惟泰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1607 - 1684 호는 초려, 시호는 문경
[김집]의 제자로 공부하였다. 1660년 공조 참의의 벼슬에 올랐으며, 1670년에는 이조 참의가 되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하였다. [김상헌]의 충성심과 의로운 마음을 찬양하는 긴 글을 왕에게 올려, 벌을 주려고 한 일에 반대하였다. 처음에는 [송시열]과 친한 사이였으나 학문에 대한 의견이 틀려 사이가 벌어졌다. 죽은 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14. 이의민李義旼
고려 명종 때의 무신 생년(?)-1196
인물.. 내용 천민 출신이었으나 체격이 좋고 기상이 활달하여 안찰사 [김자양]에 의하여 경군에 편입되었다가,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24년) [정중부]의 난 때 공을 세워 장군에 올랐다. 1173년(명종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를 위한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1174년 다시 [조위총]의 난을 토벌하고 상장군에 올랐으나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인 뒤에는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갔다. [경대승]이 죽은 후 다시 형부, 공부 상서를 거쳐서 판병부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래 글을 알지 못하여 무당의 말을 따르다가 반역을 모의하는 한편, 벼슬을 팔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횡포를 일삼아 별장에서 [최충헌]에게 살해되었다.
15. 이정암李廷암
조선 중기의 문신 1541-1600 호는 사류재, 시호는 충목
1561년(명종16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뽑혔으며, 1578년 양주 목사로 나가 향교와 도봉 서원을 다시 크게 지었으며, 또한 대동법을 실시하여서 많은 공적을 쌓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왕을 모시고 피란하던 도중에 개성에 이르러 동생과 함께 남아서 개성을 지켰다. 그러나 개성이 적에 의해 함락 되자, 피신하여 황해도에 가서 의병을 모아 활약하였으며, 그 공으로 황해도 초토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연안에서는 일본군 3000여 명을 무찔러 병조 참판의 벼슬에 올랐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다시 황해도 초토사가 되어 연안을 지켰다. 난이 끝나자 벼슬을 내놓고 풍덕으로 갔다. 1604년 연안을 지킨 공으로 선무 공신 2등이 되었고, 월천 부원군에 봉해졌다. 죽은 후 좌의정에 추증 되었다.
16. 이제현李齊賢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1287 -1367 호는 익재, 시호는 문충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뒤 높은 벼슬을 진냈다. 1314년(충숙왕1년) [백이정]의 밑에서 정주학을 공부 하였다. 그 해 원나라에 가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우고 나서 그를 불러 들이자, 베이징에 가서 원나라의 학자들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원나라 조정에 의해 귀양되자, 그 잘못됨을 밝혀 풀려나오게 했다. 그 후에도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원나라에 잡혀 갔을 때에도 원나라의 조정에 글을 올렸다. 1362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는 [공민왕]을 모시고 청주에 내려갔다. 만년에 벼슬 자리에서 물러 나온 뒤에도 왕의 명을 받아 실록을 편찬했다. 그가 쓴 <익재난고>란 책에 17수의 고려 가요를 한시로 번역하여 실은 것이 오늘날 고려 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업적 / 작품 익재 난고, 익재집, 역옹패설, 효행록
17. 이존오李存吾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1341-1371 호는 석탄
1360년(공민왕9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 서기가 되었다.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학문에 관해서 토론하였으며, 1366년에는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뒤에 [신돈]을 벼슬에서 쫓아내라고 주장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숨어서 생활 하던 중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죽은 후 뒤늦게 왕은 그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 대사헌의 벼슬을 내렸다.
업적 / 작품 석탄집
18. 이종성李宗城
조선 말기의 문신 1692-1759 호는 오천, 시호는 호강
1727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이듬해에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그 뒤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영조]가 실시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 후 다시 형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 좌의정, 영의정 등 높은 벼슬을 지낸 후 죽었다. 그는 성리학 에도 밝았으며, 문장을 비롯해서 글씨에도 뛰어났다. 벼슬에 있을 때 [장현세자]를 잘 보살폈으며, 죽어서는 [장헌 세자(사도세자)]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업적 / 작품 오천집
19. 이준경李埈慶
조선 중기의 문신 1499 -1572 호는 동고, 시호는 충정
1504년 '갑자사화'때에 형인 [윤경]과 함께 괴산으로 귀양을 갔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 나왔다. 1531년(중종26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이 되었으나, '기묘사화' 때에 =죄 없는 사람을 석방하라=고 주장하다가 [김안로] 등의 미움을 받고 벼슬 자리에서 쫓겨났다. 1555년에는 호남 지방에 왜적들이 쳐들어오자, 그는 전라도 도순찰사로 일본 군을 쳐부수고 돌아와서 병조 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568년에는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선조]에게 [정몽주]의 후손을 벼슬에 등용시킬 것을 건의 하였으며, 홍수와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백성들을 위하여 세금을 덜게 하여 존경을 받았다
20. 이하영李夏榮
조선 말기의 문신 1858-1919 호는 금산
인물.. 내용 외무아무 주사 등을 거쳐 미국 주재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다. 귀국 후 웅천, 흥덕의 현감, 회계원장 등을 지냈으며, 1898년 이후 주일 전권공사, 중추원 고문 등을 지냈다. 한일 합방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자작이되고 조선 총독부 고문을 지냈다
21. 이항복李恒福
조선 중기의 문신 1556-1618 ,호는 백사, 필운, 동강 시호는 문충
인물.. 내용 그는 어려서 부터 글 재주가 매우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소년 시절에 한음 [이덕형]과 슬기롭고 재치있는 장난을 잘 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름으로 짝이 되어 어린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1580년(선조13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589년에는 예조 정랑에 올랐다. 이 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이 모반 사건을 지혜롭게 처리함으로써 평난 공신 3등이 되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서북 지방으로 피란하게 되자, 대궐 안의 모든 신하들이 다 도망친 후였지만, [이항복] 만은 끝까지 남아 [선조]를 모시고 무사히 의주까지 피란을 갔다. 그 공으로 피란 도중 개성에서 오성군에 봉해졌으며,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남쪽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5번이나 병조 판서가 되어 활약 했고, 왕의 신임이 두터워져, 1602년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그 해 유학자들의 탄핵을 받게 된 [성혼]을 구하려다가 화를 입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는 당파 싸움이 심하였는데,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 대비]를 폐하자는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랐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심정을 시조로 읊었는데, 그 후 [광해군]이 그 시조를 읽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그는 당파 싸움에 말려들지 않았으므로 항상 혼자의 몸이었다. 외롭고 의롭게 살았던 그는 귀양간지 5개월 만에 63세로 죽었다. 죽은 뒤 다시 벼슬이 내려졌고, 예를 갖춰 장례를 지냈으며, 나라 안의 많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의 제자가 쓴 <북천일록>에 [이항복]이 귀양을 살던 당시의 일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업적 / 작품 주소계의, 사례훈몽, 노사영언
출처 : 재영이 재완이네 집
글쓴이 : 이창화 원글보기
메모 :
'일반 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주객반(主酒客飯) (0) | 2010.12.05 |
---|---|
글도 모르는 원님 (0) | 2010.10.22 |
[스크랩] 경주이씨(慶州李氏) 전체계승(全體係承)계통도 (0) | 2010.06.14 |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0) | 2010.05.22 |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0) | 2010.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