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란꽃이 우는 날 - 유치환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부러 하염없어
뒷산 솔밭을 묻고 넘쳐 오는 안개
모란꽃 뚝뚝 떨어지는 우리 집 뜨락까지 내려.
설령 당신이 이제
우산을 접으며 반긋 웃고 사립을 들어서기로
내 그리 마음 설레이지 않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기다림에 이렇듯 버릇 되어 살므로.
그리하여 예사로운 이웃처럼 둘이 앉아
시절 이야기 같은 것
예사로이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내 안에 당신과 결하여 살므로.
모란은 뚝뚝 정녕 두견처럼 울며 떨어지고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부러 하염없어
이제 하마 사립을 들어오는 옷자락이 보인다.
<청마시집>중에서 |